[장편소설] -의선(醫仙) 6 -
“그럼 선생님이 금괴가 묻힌 곳을 안다는 이야기입니까?”
이언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김수길을 노려봤다.
“알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가 없네. 자네는 돈에 욕심이 생기는 모양이군.”
이언수가 꾸짖듯이 이야기하자 김수길은 낯이 뜨거워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저 호기심이 생긴 것뿐입니다.”
이언수는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말하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면서 또한 고통의 길이다. 사람들이 보통 누가 업적을 세우면 그 결과를 부러워 하지만 그 과정의 고통을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진하여 고통을 겪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 나는 인체의 비밀을 밝히며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쁨과 낙심, 눈물과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고통 없이 무슨 업적이 있겠는가? 나는 자네가 나와 같은 심정으로 나를 따르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언수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을 중단했다. 김수길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이언수는 1932년 10월에 제주도 남제주군 안덕면 동광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 있는 당오름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58군사령부 산하의 111사단에 있던 후지와라 아키오(藤原彰夫)는 귀엽게 생긴 이언수를 측은하게 여겨서 작은 군복을 입혀서 데리고 다니면서 귀여워 해 주었다. 이언수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전하는 말로 후에 들은 것은 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후에 연락이 끊겼고 어머니는 바람이 나서 새로운 일본인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는 정도였다. 후지와라 아키오는 동네사람들에게 이언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언수를 자식처럼 귀여워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군사시설도 소년 이언수는 제지 받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도 이언수와 비슷한 환경에서 컸기 때문에 유난히 동정심을 갖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송악산의 서알오름 진지동굴은 출입구가 여러 곳이었고 동굴 폭이 5~6m나 되었고 높이가 4~5m로 대형 군용차량이 드나들 수 있었다. 일본군은 제주도를 옥쇄(玉碎)의 섬으로 작정하고 최후의 저항진지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 58군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제주로 이동하며 막대한 양의 금괴와 골동품을 가지고 왔었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자 산천단 인근에 매장하고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소수의 금괴 매장 위치를 아는 사람들도 대부분 죽었고 후지와라 아키오(藤原彰夫)는 다른 장교와 칼부림을 하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이언수에게 지도를 남기고 죽었다. 소년 이언수는 친절한 일본인 장교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후지와라 아키오(藤原彰夫)가 죽어가던 순간을 이언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피를 많이 흘려서 헛것이 보이는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다. 그러다가 낮은 목소리로 힘겹게 노래를 불렀다.
“사께(酒) 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이언수는 어려서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처량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하며 죽어가는 일본인을 위하여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여러 면에서 유별난 일본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벚꽃이 눈처럼 흩날린다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건네준 주머니에는 금반지 몇 개와 지도가 있었다. 주머니를 받아들고 전후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주위를 살피면서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였다.
“언수야,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마라.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지.”
이언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할머니에게 약속을 하고 아무에게도 이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지만 이언수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금반지를 하나씩 처분하였다. 1947년 9월에 이언수는 제주농업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지와라 아키오(藤原彰夫)의 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이언수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단결하여 총 파업을 하자. 미국을 몰아내고 민족통일을 하자.”
민주애족청년동맹 소속 선배들이 와서 그럴듯하게 열변을 토해도 이언수는 냉소적이었다. 무엇을 이해하려고 해도 지식이 일천하여 깨달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파도에 휩쓸린 나뭇조각처럼 일정한 방향 없이 물이 밀리는 곳으로 떠내려가듯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한 소문도 들렸고 좌익과 우익의 대립도 격화됐다. 이언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1948년 6월 이후로 학교에서 좌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학교에 군대가 주둔했고 중학생들은 합숙에 들어갔다. 합숙훈련은 간단한 제식훈련정도 이었는데 선배들에게 각목으로 얻어맞는 날이 많았다. 1950년 8월 말 교원양성소 창고에서 이언수는 해병대 제4기로 입대했다. 부산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맥아더는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나 되고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하므로 맥아더의 계획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고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를 수 있다며 인천상륙을 주장하여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고 인천상륙을 감행했다. 상륙기만작전으로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군산에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했다. 9월 4일부터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하여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새벽 5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여 2시간 만에 완전히 장악했다. 그 후에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를 공격했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천을 장악하였다. 이언수는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고 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 죽어가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때로 생생히 떠올라 이언수는 평생을 괴로워했다.
이언수는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럴수록 살려는 본능이 강해졌다.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맞았으나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운 여러 민간요법이 유용하게 쓰였다. 아마 그런 의술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언수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동료를 도왔고 가끔 민간인에게도 도움을 줬다. 인간의 신체의 미묘한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그에게 큰 기쁨을 줬다. 장단지구 전투에서 이언수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낮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숨어 있다가 밤만 되면 중공군과 북한군이 뒤섞여 쳐들어왔다. 처음에 배치되었던 동료들이 다 죽고 신병을 포함한 증원군으로 재배치되었다. 철조망을 치고 참호를 파서 50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밀고 당기는 전투를 계속하였는데 사방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열 번째로 적군이 밀려왔을 때는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송대호를 구하려고 중공군에게 사격을 하는 순간에 철모에 강한 충격을 느끼면서 이언수는 50고지에서 쓰러졌다. 대부분의 전우들이 몰살당했으며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북한군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간나새끼들, 싹쓸이 댓시다.”
적군의 외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얻어맞고 고꾸라지며 이언수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그저 편안한 느낌만 남는 것을 느꼈다. 쓰러진 그는 고향집에서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다가 야전 병원에서 깨어났다. 고지를 재탈환한 국군이 시체더미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이언수를 부평야전병원으로 후송한 것이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간 그는 그 시간에 할머니가 상을 차려놓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어떤 말 못할 힘을 그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무토막처럼 쌓여있던 시체더미에서 살아나온 이언수는 끝끝내 영혼을 믿지는 않았다. 그는 정신적인 영역의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장단지구 전투 때문이었다. 장단지구전투에서 그는 완전히 혼이 나간 듯이 중공군을 살육했다. 50고지에서 수백 명의 중공군을 향하여 무수히 수류탄을 던지고 팔다리가 찢기고 날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 전투에서 적에게 뒷머리를 가격 당하여 정신을 잃을 때까지 오직 살기 위하여 적을 죽였다. 대부분의 동료가 전멸 당한 뒤 그가 야전병원에서 깨어난 후로 그는 귀신을 믿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귀신이 존재한다면 수백 명의 원혼을 만든 셈이었다. 6년을 군대에서 보낸 후에 이언수는 해군해병 이등병조로 제대했다. 철저한 유물주의자가 되어서 인간의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고 그 원리를 이해하는데 온힘을 바쳤다. 이언수가 골방에서 두문불출하자 사람들은 그가 전쟁후유증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이언수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침술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던 중에 하루는 연탄난로를 피워놓고 책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가 정신을 잃었다. 동치미 국물을 먹여서 할머니가 이언수의 생명을 구했으나 그는 거의 10년간 백치에 가까운 상태로 멍하니 앉아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그는 회복됐으며 과거보다 오히려 더 현명해졌다. 그는 수많은 의서를 읽고 연구했다. 진국태의 비방도 연구했으며 진국태의 전설을 수집하여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진국태는 신비한 인물로 알려져서 사람을 보지 않고도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보통 환자의 얼굴만 봐도 무슨 병이 들었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알았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이언수는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진국태에 관한 전설을 묻고 다녔다.
김순이
2005-10-10 18:33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요. 이언수가 언뜻언뜻 싸늘해지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강병철
2005-10-11 01:19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읽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얼굴이 붉어집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상냥한 마음이 가득 담긴 격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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