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 불당의 종소리 울리며 밝아지면 통정의 부인 수심에 잠겨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김 혁정 들어온다. 부인은 임신을 해서 배가 봉긋한 상태다.
혁 정 : 마누하님, 밤이 깊었는데 그만 침소에 드시지요.
부 인 : 달이 무척 아름다워서 잠이 오지 않는군요. 오늘따라 갑자기 고향에 부모님 생각도 간절하고요.
혁 정 : 어디 마누하님 뿐이겠습니까?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니 잠 못 이루는 병사들이 많습니다.
부 인 : 어서 전쟁이 끝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에게 돌아가야 할텐데.
혁 정 : 하온데 대장군께옵선 아직도 불당에 계시옵니까?
부 인 : 예. 오늘이 보름쨉니다. 명상에 드시면 쌀 한 톨 안 드시고 꼿꼿이 열흘 한 달을 버티시니 이 일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혁 정 : 과념 마십시오. 병법과 지략을 준비하고 계신 겁니다. 대장군께서는 앞일을 환히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잖습니까? 대책이 서면 금방이라도 환속하실 겁니다.
부 인 : 걱정 돼서 그러지요. 헌데,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혁 정 : 예. 방금 개경에서 보낸 초유사가 당도하여 장군님의 하명을 기다리는 중이옵니다.
부 인 : 개경에서 사람이 왔다구요?
혁 정 : 그러하옵니다. 거기에는 장군님의 조카도 있사옵니다.
부 인 : 우리 조카라니 누굴 말하는 겁니까?
혁 정 : 장군님이 나오십니다.
통정 근심스런 표정으로 나온다.
통 정 : 아니 밤이 깊었는데 낭장은 어쩐 일인가? 무슨 변고라도 생겼나?
혁 정 : (예를 갖추며) 그건 대장군께서 잘 아실 것이옵니다.
부 인 : 시장하시지요? 곧 진지상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통 정 : 몸은 괜찮소? 산모가 강건해야 튼실한 후사를 생산할 것 아니겠소?
부 인 : 예. 약을 부지런히 달여 먹고 있습니다. 하온데, 표정이 왜 그리 어둡사옵니 까? 무슨 좋지 못한 징조라도 있습니까?
통 정 : 누가 이리로 왔소?
혁 정 : 개경에서 회유사 일당 다섯 명이 도착하여 장군님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통 정 : 일찍이 진도에 사람을 보내어 우리 눈을 가리고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공격했다. 오직 부모처자는 가장 애중한 것인데 그들을 죽였으니 이것이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는 연유다. 지난 번 금훈이란 자를 살려 보내었더니 그를 몽고에 보내어 우리를 평정해 달라고 애원했다지? 원수의 앞잡이들, 그러고서도 다시 회유하려 들다니. 모두 참수하여 바다에 처넣으리라.
혁 정 : 하오나, 이번에 온 자들은 장군님의 조카 김찬과 이소 그리고 오인절 장군 의 친족 등이옵니다.
부 인 : 찬이와 이소가?
통 정 : 나쁜 놈들. 이젠 혈육을 미끼로 이용하다니. 그들의 머리를 베어서 돌려보내라.
부 인 : 장군.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통촉하옵소서. 찬이는 갓 이팔을 넘은 꿈 많은 장부이옵고, 이소는 제 오라버니 아들 아닙니까? 그들이 오고 싶어 왔겠습니까? 우릴 보고 싶어 왔겠습니까? 제발 그들을 한번 만나 보시기나 하시고 결정해도 늦지 않사옵니다.
통 정 : 듣기 싫소. 그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소? 우린 이미 많은 것을 잃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소. 이럴수록 강해져야 하오.
부 인 : 하오나.
통 정 : 해상은 이미 우리 손에 있소. 몽고놈들 만행에 경상전라 백성들 일어서고, 연안 수령들도 투항해오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우리의 단호한 의지가 사소한 인정에 꺾여서 되겠소?
이때,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앵 두 : (소리) 이거 놔. 난 장군님을 만나야 해.
병 사 : (소리) 밤중에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웃거리느냐?
혁 정 : 거기 누구냐?
병사, 남장을 한 앵두를 끌고 들어온다.
병 사 : 장군님 침소를 기웃거리던 자이옵니다.
통 정 : (가까이 가서 보고 놀라며)아니, 낭자는?
혁 정 : 탐라성에서 본 그 계집 아닙니까?
앵 두 : 장군님.
통 정 : 저번엔 뜨거운 물로서 벌하더니 이번엔 무엇으로 날 놀라게 할 건가?
앵 두 : 그런 게 아니옵니다.
통 정 : 난 의심 많은 섬사람들을 이해 못해. 이 낭자는 내가 직접 국문할 것인즉 물러들 가라.
부인과 김혁정 예를 표하고 들어간다. 부인 들어가다 몰래 숨어서 대화를 엿듣는다.
앵 두 : (통정의 품에 안기며)장군님. 저를 섬 것이라 얕보시는 겁니까?
통 정 : (의외의 행동에 당황하며 그러나 살며시 감싸 안는다)얕보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아리땁고 똑똑한 섬 색시를 내가 어찌 얕보겠소?
앵 두 : (사이, 풀려나오며) 그럼 되었습니다. 소녀 여한이 없습니다. 차라리 소녀의 무례를 벌하옵소서. 하오면 저는 잠시라도 가까이서 장군님을 뵙게 될 것이니 그것이 더 참기가 쉬울 것입니다.
통 정 : 어머니가 보내신 사람인데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난 그대 속에서 위안을 찾겠소.
앵 두 : 하오면 장군님도 미천한 소녀를 생각하셨단 말씀입니까?
통 정 : 꿈속에서 당신을 봤소.
앵 두 : 장군님을 처음 뵈온 그날, 소녀는 마냥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오나 가까이 할 수 없는 높으신 몸. 잊으려 해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당돌한 이 소녀. 용서치 마옵소서.
통 정 : 성안에 머무시오. 내가 돌볼 것이오. 내 어머니처럼 당신을 모실 것이오.
앵 두 : 고맙습니다. 장군님. 저도 장군님을 성심껏 돕겠습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너른 세상으로 나가는 그날까지 장군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통 정 : 고맙소. 천하를 얻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거요.
앵 두 :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물 건너 세상 구경시켜 주십시오.
통 정 : 내 약속하리다.
기척 소리에 놀라 부인은 숨고, 잠시 후 국성이 나타난다.
통 정 : 어서 오시오. 문 교위. 반가운 사람이 여기 왔소.
국 성 : 탐라성에서 사람이 왔다길래 누군가 했더니, 그대는 앵두낭자가 아니오?
통 정 : 왜 아니겠소. 우리를 도우려고 자진해서 왔소.
앵 두 : 오랜만입니다. 교위님. 노고가 많으시지요?
국 성 : 고맙소 여기까지 위문을 다 와주시고. 헌데 그 복장은 무업니까?
앵 두 : 나라를 되찾는데 아녀자도 힘을 모아야지요. 교위님을 뵈러 온 것 아니니 참견 마십시오.
국 성 : 대장군. 앵두 낭자는 소장과 혼인을 약조한 사입니다.
앵 두 : 전 혼인을 약조한 바 없습니다. 하옵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어찌 개인의 안일과 행복을 구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장군님을 도우러 왔을 뿐입니다.
부인, 배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면서 나타나, 마당에 쓰러지는데 무대 어두워진다.
김문수
2015-09-05 12:10
회가 거듭될수록 이야깃 거리가 재미있네요
제주도 삼별초의 난을 배경으로 쓴 작품속에 주요 등장 인물도
매우 좋은데요.저는 시마을에서 <한반도의 대지진>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희곡 <살어리 살어리랏다>계속 구독하겠습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희곡의 작품 보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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