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주 : 잘 왔어. 쿠빌라이 폐하께서도 흔도 대인에게 삼별초를 평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남해안에 수만 군사가 집결 중이야. 이제 곧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이 들이닥치면 삼별초는 끝장이야.
앵 두 : (고집스럽게)이럴 순 없어요. 전 돌아와도 제 발로 올 겁니다. 가겠습니다.
이 화 : (막아서며) 가긴 어딜 간다는 게냐? 네가 가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절대 보낼 수 없다. 가고 싶으면 우릴 다 죽이고 가거라.
성 주 : 마음을 돌려라. 어쩌겠냐? 이게 다 시절 탓인걸. 몽고의 대세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냐?
이 화 : 앵두야. 사람 사는 일이 어디 제 뜻대로만 된다든. 이제 그만 하면 됐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사랑인데 꼭 끝을 봐야하겠니? 이젠 다 잊어라. 그리고 연합군이 당도하기 전에 문 교위와 혼인을 치렀으면 한다.
앵 두 : 전 이미 장군님과 혼인한 사인데, 또 무슨 혼인 말씀이세요?
이 화 : 문 교위가 네 허물을 다 눈감아준단다. 얼마나 고마운 분이냐.
앵 두 : (대들 듯) 언니, 내 몸은 하나야. 내 일은 내가 결정해. 이래라 저래라 명령 마세요.
이 화 : (뺨을 갈기며) 나쁜 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지금까지 누구 때문 호강했는데, 그 따위 소리야!
앵 두 : 그래요. 때려요. 놓아주기만 하신다면 병신 되도록 맞겠어요.
성 주 : 부인 왜 이러시오? 앵두야. 지금, 개경에서 손님이 와 계시다. 본진에 앞서상황을 파악하러 오신 거야. 항파두리에 통문을 돌려 부역하고 있는 자들에게 돌아오도록 하라는 거야. 만약 투항하지 않는 자는 그 가족까지 살려두지 않겠단다.
앵 두 : 김통정 장군이 있는 한 삼별초는 무너지지 않아요. 그는 우리의 수호신이에요. 제발 후손을 위해서도 삼별초를 도와야 해요.
이 화 : 넌 항파두성에 갇혀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무지막지한 태풍이 몰려오고 있단 말이다. 이것아.
앵 두 : 난 장군님과 운명을 함께 할 거야.
이 화 : 미친 년.
성 주 : 허어. 이것 참. 네가 이러면 성주인 내 입장은 어떻게 되겠느냐? 날 좀 살려 다오.
이 화 : 앵두야. 정신 차려. 이건 우리 탐라국의 생존이 달린 문제란 말이야. 너 혼자 살자고 우릴 모두 죽일 거니? 네가 진정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한다면 그를 놓아주어야 해. 넌 그를 흔들고 있어. 싸움에 전념해야 할텐데, 네가 방해하고 있단 말이다.
앵 두 : (충격을 받고)언니, 정말 제가 그랬나요? 전 장군님을 돕고 있는데.
이 화 :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넌 분열을 일으키고 있잖니? 당장 연합군이 코앞에 닥쳤는데. 네 의도가 그거였니?
앵 두 :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아니예요. 아니예요. 전 그런 사악한 여자가 아니예요.
이 화 : (부드럽게) 앵두야. 잘 생각해 보아라. 잠시만 떨어져 있는 거야. 이번 싸움이 끝나 살아있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당실 들어온다.
당 실 : 마나님, 큰 일 났어요.
성 주 : 무슨 일이기에 기척도 없이 뛰어 들어오느냐?
당 실 : 김통정 장군님이 오셨어요.
앵 두 : 뭐라고? 장군님이?
김통정 들어온다.
통 정 : 성주. 실례 좀 해야겠소.
이 화 : 맙소사.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성 주 : 아니 어인 일로, 기별도 없이.
통 정 : 무례하다고 생각지 마시오. 앵두를 데려 가겠소.
성 주 : 안될 말이오. 처제를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소이다. 돌아가시오.
통 정 : 성주. 당신이 내 앞길을 막을 수 있겠소?
앵 두 : 장군님. 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통 정 : (주위 사람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오.
통정과 앵두만 남기고 모두 퇴장한다.
통 정 : 앵두. 난 기다릴 시간이 없소. 왜 못 간다는 거요.
앵 두 : 장군님, 때가 되면 제 발로 갈텐데 왜 오셨습니까? 이러면 많은 피를 부른다는 걸 모르십니까? 저를 믿으십시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장군님 곁으로 갈테니 돌아가십시오.
통 정 : 앵두가 가지 않겠다면 나도 못 가오.
앵 두 : 장군님 마누하님을 돌보셔야 합니다.
통 정 : 다 부질 없는 생각이요. 부인은 집착이 병이고, 그걸 이기지 못해 평생 나를 괴롭힐 것이오. 앵두는 그걸 이겨내야 하오.
앵 두 : 제가 장군님 곁을 잠시 떠나 있는 것이 구국일념의 뜻을 펴시는 길입니다. 그걸 위해 막다른 섬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너무 소녀에 집착 마십시오.
통 정 : 나한테 힘을 주시오. 당신이 없이는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소.
앵 두 : 장군님. 제가 어찌 장군님을 배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항파두성 안의 공기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적군들이 코앞에 당도해 있지 않습니까?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통 정 : 당신 없인 어머니의 예지를 받을 수 없소. 만날 수 있게 도와주오.
앵 두 : 밖에는 관군들이 외어 쌌어요.
통 정 : 당신이 따라 나서지 않는 한,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요. 내 죽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그리하리다. 어서 날 죽이라 하시오.
앵 두 : (통정의 품에 안기며)장군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장군님을 따르겠습니다. 죽더라도 장군님 곁에서 죽을 겁니다.
통 정 : (포옹을 풀며) 고맙소. 자 나갑시다.
보 연 : 흥. 제발로 걸어 들어오셨군. 반란의 역적놈. 넌 이미 독 안의 쥐새끼 신세 다. 순순히 포승을 받아라.
통 정 : 감히 누구더러 역적이라 하느냐? 송보연, 너도 삼별초 출신 아니냐? 헌데 장부의 신의를 헌 짚신처럼 버리고, 어찌 오랑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나?
보 연 : 말조심하라. 앞잡이라니. 역사의 조류를 누가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세파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것도 장부의 지혜 아닌가?
통 정 : 장부는 개인의 영명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늘, 대대로 이어온 민족 자존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삼별초의 대의를 잊었나?
보 연 : 넌 어느 나라 백성이냐? 임금께서 삼별초의 해산을 명한 지 오래고, 투항할 것을 수차례 권고하였는데, 승하후를 옹립하고 연호를 만들어 쓰면서 개경으로 오는 공물마져 빼앗으니 네가 역적이지.
통 정 : 아무리 천명이라 할지라도 길이 아니면 가지 못하는 법. 백성들은 굶어 죽는데도 조세는 많아졌고, 도적들한테 가는 물자를 도로 돌려주는 것이 어찌 도적질이냐? 몽고의 꼭두각시 노릇하는 개경정부를 우린 인정할 수 없다.
보 연 : 어리석은 짓 그만하고 투항하라. 연합군에 대항하는 건 앞발을 들어 수레를 막는 사마귀와 같다. 무고한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라.
국 성 : 순순히 항파두리 성문을 열라 명하시오.
앵 두 : 문 교위님. 장군님이 돌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십시오. 문 교위님도 죽을 목숨 살아오신 것 아닙니까?
국 성 : 난 탐라의 관리로 응당 할 일을 한 것일 뿐 첩자 모함은 당치도 않소.
통 정 : 좋다. 누가 내 앞길을 막을 건가? 어디 덤벼봐. 설령 내가 잡히더라도, 탐라성은 연합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쑥밭이 될 거야.
국 성 : 그런 소리 마시오. 이미 대세는 기울었소. 당신은 우리 꾐에 속은 거야. 앵두 낭자의 덫에 걸린 거라구.
통 정 : (앵두에게)앵두 당신이?
앵 두 : 장군님. 전 장군님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국 성 : 낭자 이젠 장난 그만 하시고 소신한테 돌아오시오.
앵 두 : 좋습니다. 소녀를 원하신다면 장부답게 결투하세요. 문 교위님이 이기신다면 기꺼이 그대 품에 안기리다. 허나, 김통정 장군이 이긴다면 귀로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이 화 : 아니, 앵두야.
왕 자 : 이거 무슨 짓이야? 뭣들 하느냐, 저 역적을 붙잡지 않고.
통 정 :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 앞으로 나서라.
도 내 : (앞으로 나서며) 여기서 이러면 많은 사람이 피를 보게 됩니다. 앵두의 말대로 둘이서 결판을 내는 게 합당한 처사인 것 같소.
국 성 : 좋습니다. 장부답게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앵두 낭자를 얻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걸겠습니다.
왕 자 : 국성아. 너 어쩌려고 이러니. 안 된다. 그만 둬.
국 성 :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역적을 잡아 가문을 빛내고 앵두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횝니다. 송 장군님도 소신이 공을 세우는데 증인이 돼 주십시오.
보 연 : 약속하지. 어차피 개날에 잡으나 복날에 잡으나 손해 될 것 없으니까.
국 성 : (칼을 빼들고) 자 덤벼.
통 정 : 우리를 그냥 보내 주게. 자넨 상대가 될 수 없어.
국 성 : 흥. 넌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야. 어서 칼을 뽑아라. 내 손으로 역적의 목을 베어 탐라성 높은 곳에 걸어 놓을테다.
통 정 : 장부의 호기가 가상쿠나. (칼을 빼들고)누가 역적인지는 하늘이 심판하실 게다. 덤벼라.
장중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통정과 국성 칼을 빼들고 결투를 벌인다.
몇 합을 겨루다 이내 국성이 칼을 놓치고 쓰러진다. 통정, 국성을 밟고 서서 목에 칼을 겨눈다.
앵 두 : (다급하게)그만. 그만 하세요. 장군님이 이기셨어요.
통정, 칼을 거두고 돌아서자, 쓰러졌던 국성 다시 칼을 집어들어 통정을 뒤에서 치려한다. 통정 재빨리 피하며 국성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앵두의 비명과 함께 급격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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