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축제가 한창이었다. 눈처럼 날리는 꽃잎 사이로 백발노인이 푸른 소 위에 앉아서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인자하게 생긴 노인도 특이 했지만 푸른 소는 김수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떠들썩한 군중 사이를 지나가는 푸른 소와 노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김수길을 똑바로 쳐다보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미소로 답하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이 김수길의 가슴에서 요동쳤다. 돌이켜 보면 그처럼 기뻤던 기억은 김수길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인이 멀어지고 난 후 그는 옆에 있던 친구 윤호에게 푸른 소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금 지나간 푸른 소 봤지. 참 신기하다.”
윤호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무슨 소리야? 푸른 소라니? 색칠한 소가 있었냐? 축제라서 별게 다 나오는 모양이지. 하지만 소에다 푸른 칠을 하는 게 뭐 재미있다고?”
김수길은 윤호를 돌아보며 다시 자세히 설명하였다.
“아니 금방 지나가는 푸른 소를 같이 봤잖아. 칠한 소가 아니고 원래 푸른 소던데.”
윤호는 그런 소를 본적이 없다며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고 김수길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물었다. 그는 더 이상 푸른 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그 푸른 소와 노인을 목격한 것은 김수길의 청소년기를 끝내는 사건이었다. 그러고 나서 오랫동안 김수길은 그 푸른 소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든 만남은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필연이다. 서울 동숭동의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마로니에 꽃을 올려다보고 있는 최윤정을 만나던 날 김수길은 단번에 그녀가 그의 운명의 여인임을 알아보았다. 길이 30cm 정도의 대형 원추꽃차례가 나온 칠엽수의 꽃대에는 수백 개의 작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흰색 꽃잎의 아래 부분은 분홍색이 번져있었다. 마로니에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김수길의 마음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마로니에는 물론이고 주위의 아무 것도 김수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최윤정의 가느다란 하얀 목과 검고 깊게 느껴지는 눈동자만이 강하게 그의 가슴 속 깊이 각인 되었다. 김수길의 인생의 전반부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최윤정이었고 그의 후반부의 삶의 철학을 좌우하게 만든 것은 이언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돌이켜 생각해봐도 최윤정이 왜 그렇게 강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에 김수길이 이끌렸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언수로 말하자면 상황이 전혀 달랐는데 그는 평범하면서도 매우 기묘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 아마도 누구든지 그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든 그의 기이함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김수길의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김수길은 할인매장 '큰마트' 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트에 통조림을 진열하려고 들어갔더니 모든 제품에 차압표시가 되어 있었다. 입점할 때 김수길에게 모멸감을 주며 거만스럽게 굴던 마트사장인 김정태를 지금 만난다면 뺨을 소리 나게 철썩 한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수길은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울컥 화가 복받쳐 오르자 또다시 오른쪽 뒤통수가 아파 오기 시작하였다. 통증을 참으며 매장에서 걸어 나와 차를 타려는 그의 옆에서 지나가던 승용차가 멈춰 섰다. 그는 고물승용차에서 한 노인이 고개를 내밀고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염소수염을 기른 다소 우스꽝스럽게 생긴 노인이었다.
“여보시오. 뭐 좀 물어봅시다.”
김수길은 모든 것이 귀찮은 심정이었으므로 처음에는 그 노인의 부름을 무시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먹고 노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수길은 볼멘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노인 직업 안내소가 이 근방 어디에 있다고 하던데......”
김수길은 헐렁한 옷차림의 다소 우스꽝스럽게 생긴 노인에게 서쪽 방향으로 두 골목에 아래에 있는 노인인력은행의 위치를 설명하려다가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직접 안내하기로 결심했다.
“제 차를 따라 오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노인은 김수길의 뒤를 따라서 아주 느린 속도로 낡은 소형차를 몰았다.
노인인력은행이란 곳은 종교부설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신앙심 없이는 근무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이었다. 좁다란 공간에 작은 소파와 책상 두 개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그 사이로 걸어 다니는 공간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김수길의 철학과 대학선배인 정선태는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노인인력은행에서 사무국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 일은 생각처럼 만만하지가 않았다. 지난번에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정선태가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서 일하기 위하여 매일 저녁 좌선을 한 시간 이상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가 이언수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여사무원이 문서를 철하고 있었다.
“정선배님, 저 김수길 입니다.”
정선태는 김수길에게 미소로 인사를 하고는 이언수를 잠깐 멍하니 보고 나서 표정이 굳어지더니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서류를 덮었다.
“수길아. 지금 정신없다. 감사가 며칠 남지 않았거든.”
그는 진땀을 흘리면서 지출 결산서를 맞추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감사에 대비해서 모든 자료를 점검하느라 정신없이 부산을 떨던 중이었는데 김수길이 방문한 것이었다. 소파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은 정선태는 같이 들어온 이언수를 힐끗 보고는 외면하고 상을 찌푸리면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김은정 사회복지사가 이언수에게 왜 다시 왔냐고 물었다.
“ 내가 잡일이나 간병사를 한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일을 할까 해서 다시 왔소. 치료를 하면했지 무슨 간병을 한다고...... 여기는 몇 번이나 왔는데도 매번 찾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이분이 안내를 해줘서 쉽게 찾아왔지. 에휴.”
썰렁한 분위기와 오가는 대화를 들으면서 김수길은 이언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르신, 그러면 업종을 기타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김은정이 공손히 대답했지만 경멸감과 짜증이 섞여 있다는 걸 김수길은 알아차렸다. 김수길은 이 영감님을 데리고 이 사무실을 빨리나가야 된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감님, 제 사무실로 가서 차나 한 잔 하시죠.”
이언수는 작은 눈을 빤짝이면서 반가운 듯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좋지, 그럽시다.“
김수길은 정선태에게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인사를 하고 바삐 그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언수는 팔자걸음으로 원기 왕성하게 김수길을 따라 나왔다.
“영감님은 침술을 공부한 모양이죠?”
김수길은 건성으로 물어봤다.
“그럼 침술, 한의학, 대체의학 등 의술에 관한 거라면 공부를 안 한 것이 없네. 전부 공부했지.”
김수길은 이언수가 자신 있게 한의학의 대가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와 불필요한 대화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만병통치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이언수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자네 어디 아픈데 없나? 내가 치료해 주지.”
김수길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지었다. 하지만 노인에게 공손히 대하던 버릇 때문에 이언수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 별로 아픈 데는 없지만 오른쪽이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
이언수는 김수길의 전신을 훑어 본 후에 말하였다.
“식욕이 없고 오른쪽 어깨가 아프지! 오른쪽 뒷머리도 아프고 가슴에 통증이 있고, 오른쪽 엉덩이도 아프고.”
김수길은 이언수의 설명에 다소 놀랐다.
“아니? 그걸 어떻게?”
이언수는 다시 김수길에게 똑바로 서보라고 지시했다. 다리 사이에 틈이 생기는 것을 보고 다리를 붙여 보라고 했다. 김수길은 다리를 붙여 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다리 사이의 공간은 없앨 수 없었다. 이언수는 그걸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자 내가 다리를 붙여 줄 텐데, 이건 절대 마술이 아니네. 인체역학이지.”
말을 마치자 이언수는 김수길의 다리를 들고 장딴지를 탁하고 소리 나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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